서촌의 골목길에 자리잡은 엔티엘(ntl) 갤러리는 패션&라이프스타일 편집숍 므스크(musk)가 운영하는 곳이예요. 갤러리 공간이 따로 있지는 않고 매장 곳곳을 갤러리로 활용했죠. 그렇다고 작품을 감상하는데 방해가 되진 않아요. 오히려 예술이란 우리의 생활 구석구석에 자리 잡을 수 있다는 것이 느껴졌죠. 엔티엘(ntl) 갤러리에서 만난 사진가 표기식의 사진은 한 작품을 빼고는 모두 작은 크기의 무광 유리 액자 안에 넣어져 있어요. 전시 공간의 크기 때문이기도 했고, 사진을 들여놓는 사람들이 자신의 공간 어디에나 둘 수 있도록 하고 싶었다고 해요.
표기식 작가가 담아낸 꽃과 나무, 숲과 강은 우리가 쉽게 만날 수 있는 풍경이지만 작가가 담아낸 계절의 모습들은 왠지 생경하게 다가와요. 그렇게 미처 발견하지 못했던 계절의 순간들이 표기식 작가의 사진 안에 담겨 있었습니다.
편집/이미지 '마니' , 디자인 '임그노드' , 디렉팅 '해리'
표기식의 사계절
사진 출처 : 라켓 촬영
엔티엘(ntl) 갤러리에 있는 작품들은 어떤 사진들인지 소개해주세요.
엔티엘 갤러리에 들어가자 마자 보이는 숲 사진을 제외하고는 작년 개인전과 겹치지 않도록 지난 1년 사이 찍은 사진 중에 선택했어요. 숲 사진은 2016년 교토의 ‘아라시’ 산에서 촬영한 컷인데 이 사진을 시작으로 제가 숲과 꽃, 나무 등의 자연물에 좀 더 깊이 파고들게 되었죠. 광고 촬영차 간 곳에서 별 생각없이 뒤돌아 본 곳에 숲의 구멍 같은 곳이 있었고 그 모습이 신비로워서 서너컷을 급히 찍었어요. 한국에 돌아와 사진을 확인해 보니 너무 좋았고 이런 느낌으로 국내에서도 좀 더 찾아보고 싶어 자연을 주제로 한 개인 작업을 본격적으로 하게 됐죠. 지금 갤러리에 걸어둔 컷이 ‘아티스트 프루프’ 버전이예요.
아라시 숲 사진을 제외하면 모두 사진의 사이즈가 작은 편이예요. 특별한 의도가 있는지 궁금했어요.
스튜디오를 이사할 때 마다 커다란 액자를 옮기는 일이 반복되다 보니 큰 액자들이 마치 ‘전생의 업’처럼 느껴졌어요.(웃음) 전 집에서 사진을 볼 때 보통 아이패드로 봐요. 이번 전시 사진들도 대부분 아이패드 사이즈로 맞췄죠. 우선 엔티엘 갤러리의 전시 공간이 크지 않기도 했고, 아이패드 정도의 사이즈면 휴대도 편하고 액자를 걸지 않고도 작품을 즐길 수 있는 크기죠. 작은 사이즈의 사진은 밀도가 올라간다는 장점도 있어요.
자연으로의 몰입
사진 출처 : 라켓 촬영
앞서 아라시 숲에서 찍은 사진 이후 자연에 더 몰입하게 되었다고 말씀하셨죠. 자연의 어떤 힘이 계속 이끄는 걸까요? 계절은 물론 시간에 따라 자연의 모습이 계속 변해요. 예전에는 겨울을 별로 좋아하지 않았어요. 무성한 것들이 모두 가라앉고 사라지면서 속살이 드러나는 것 같았죠. 나무라는 피사체도 면이 사라지며 선만 남고, 그 선도 너무 많아서 양감이 사라지죠. 겨울은 사진 찍기에 재미없다고 생각하던 중에 재작년 한강에서 겨울의 새로운 모습을 발견했어요. 나무를 뒤덮고 자라는 덩쿨이 겨울이면 모두 시들어 버리는데 그 모습이 마치 유령 같은 형태처럼 느껴졌죠. 자연은 어느 시간대에 어떻게 보느냐에 따라 달라져요. 때문에 ‘오늘은 뭘 수집할 수 있을까’라는 생각이 들게하고요. 대나무 숲이 유명한 아라시 산에서 찍은 사진도 ‘아라시’를 아무리 인터넷으로 검색해도 제가 촬영한 장소의 이미지가 나오지 않아요. 늘 그곳에 있었지만 저만 발견한 모습인 셈이죠.
지금 전시 중인 사진 중에 찍었을 때의 순간이 가장 기억에 남는 때가 있다면요? 음, 고생의 난도로 따졌을 때만 보면 겨울 나무의 사진이요. 개인작업은 일종의 저와의 약속이자 루틴인데요, 펑펑 눈이 쏟아지는 날, ‘세상이 아름다워 질 것이 분명’하기 때문에 고생스러운 걸 알면서도 나갔어요. 행주산성 근처 방화대교 아래에서 촬영한 나무인데, 나무는 다리 때문에 눈이 쌓이지 않았지만 나무 뒤로는 눈이 쌓인 산이 펼쳐지면서 사진에 레이어링이 생겼어요.
개인작업이라는 루틴은 언제부터 가지게 된 시간인가요? 2013년부터 2014년 8월까지 1년간 한강에 있는 수양버드나무 한 그루만 촬영한 적이 있어요. 그때부터 개인작업이 하나의 루틴이 되었죠. 그때는 아침 먹고 그 나무를 찍으러 가고 점심 먹고 또 가고 그런식으로 거의 매일 찍었어요. 어떤 사정으로 못가기라도 하면 마음이 불안해졌죠. 가을에는 나무의 잎이 점점 떨어져나가는 과정을 촬영하고 싶었는데 버드나무의 잎이 생각보다 오래 붙어있더라고요. 그런데 비가 오더니 다 떨어져버렸죠. 매일 촬영했는데도 잎이 떨어지는 순간은 놓쳤어요. 변화의 틈을 최대한 놓치지 말아야겠다는 생각이 들면서 개인작업이 제 일상의 루틴이 된 거죠. 한강만 하더라도 오늘과 내일의 날씨가 다르고 물이 들어올 때와 나갈 때의 모습이 달라요. 바람이 물에 닿느냐 아니냐의 변수도 있고요. 그 변수를 최대한 많이 담고 싶어요.
사진을 찍는 순간
사진 출처 : 라켓 촬영
한 가지 일을 오래 한다는 건, 그 일에 대한 마음이 한결 같아야 할 수 있는 일이라고 생각해요. 계속해서 사진을 사랑할 수 있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사진 찍을 때 만큼은 아무 생각하지 않아요. 한 컷을 찍을 때 숨을 한 번 고르고 엄청 집중하게 되는데 그 순간이 좋죠. ‘오늘은 뭘 찍을 수 있을까’라는 생각을 하는 것도 좋고. 어제는 양평에 다녀왔어요. 가는 길에 처음 가본 편의점에 들렀는데 편의첨 유리문에 윤슬이 반사되는 게 비췄어요. 그래서 뒤를 돌아봤더니 뒤로는 산이 있고 가을 단풍이 걸쳐진 곳으로 반짝이는 강물의 모습이 보였어요. 그 순간을 촬영하는데 멀리서 제트스키의 모터소리가 들렸죠. 제트스키가 강물을 지나고 나면 파동이 커져서 반짝임이 더 많아졌어요. 그 모습이 기대되서 어서 사진을 확인하고 싶었죠.
사진을 찍고 싶은 순간을 특정할 수 있을까요? 다시 만나지 못할 것 같은 순간. 저를 가장 잘 아는 사람은 결국 저예요. 저는 여행을 엄청 많이 다니지도 않고 한강말고는 자주 가는 곳도 없죠. 바다가 보고 싶다고 갑자기 바다에 가는 유형의 사람이 아니예요. 아라시 산도 출장갔다가 발견한 거지, 그 숲을 찍기 위해 제가 간 건 아니었죠. 그런 제 성격을 제가 잘 알기 때문에 돌아서면 눈에 밟히는 이미지들은 빠짐없이 찍으려고 해요. 만져서 상황이나 형태를 조정하고 조율하는 것 보다 있는 그대로를 담는 게 좋아요. 저만 부지런하면 되는거죠.
⚫ 장소 : 엔티엘(NTL) 갤러리 ⚫ 주소 : 서울시 종로구 자하문로 12길 30 ⚫ 관람료 : 무료 ⚫ 관람시간 : 오후 12시 ~ 오후 8시 (일요일 휴관) ⚫ 기간 : ~ 2022.11.19 ⚪ 문의 : 인스타그램 @ntlgallery_seou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