테이블 위에 놓인 화병과 과일들, 술잔과 테이블 위에 기대어 있는 사람, 그리고 그림 속의 그림. 우연히 sns에서 박가희 작가의 작품을 본 후 페로탱 갤러리 도쿄에서 개인전을 연다는 소식을 들었어요. 아쉽게도 전시를 직접 볼 수는 없었지만 해외에서 활동 중인 박가희 작가와 이메일로 인터뷰를 할 수 있었습니다. 한국에서 나고 자라 미국에서 미술을 공부하고 작업하며 경험한 여러 감정들은 다양한 방식으로 작품에 표출되었고, 자신이 추구하는 예술의 방식을 찾아가고 있다는 박가희 작가는 오늘도 많은 이야기가 흐를 수 있는 그림을 그립니다.
편집/이미지 '마니' , 디자인 '임그노드' , 디렉팅 '해리'
의미들
Courtesy of the artist and Perrotin
Q1. 현재 페로탱 도쿄에서 <Eveningness>라는 이름으로 개인전이 열리고 있습니다. ‘저녁’이라는 시간이 담긴 단어를 제목으로 정한 이유가 궁금해요.
작품 제목은 작품을 다 마친 후, 전시 제목은 작품들이 모두 완성 되면 짓곤 합니다. 전시 제목을 정할 때 작업에 특정 의미를 부여하거나 내러티브가 이어지는 것을 원하지 않기 때문에 모든 작품들로부터 약간의 거리감을 둔 제목을 지어요. ‘Eveningness’ 역시 전시 준비가 다 끝난 후 작품들을 보며 정했습니다.
‘Eveningness’의 사전적인 뜻은 ‘저녁에 더 활동적인 상태’에요. 예전부터 황혼의 시간, 땅거미가 질 무렵 즈음의 시간대에 관심이 많았어요. 황혼은 날이 지는 상태이자 동시에 죽음과 종말의 의미를 가지고 있으며 더불어 가장 활동적인 시간이며 가장 살아있는 시간이기도 합니다. 이번 전시가 정물화적인 시각, 추상적인 공간들과 초현실주의가 어우러질 수 있기를 바랐어요. ‘Eveningness’라는 단어에는 이 다양한 의미들이 간결하고 아름답게 담겨있다고 생각했습니다.
Courtesy of the artist and Perrotin
Q2. 작가님의 작품은 정물화를 베이스로 합니다. 한 프레임에 담겨 있는 요소들이 일상에서 쉽게 만날 수 있는 것들이지만, 작가님의 작품에서는 또 다른 이야기를 지니게 되는 것 같습니다. 이를 테면 새우의 이야기처럼요. 칵테일 잔 안에 든 새우는 언뜻 음식처럼 보이지만 그림 안에서는 ‘바다로 돌아가고 싶은 새우’라는 이야기가 담기죠. 작업할 때면 어떤 사물이나 인체 부위로부터 작품이 출발하나요, 아니면 전하고 싶은 이야기로부터 작품 구상이 시작되나요?
페인팅 작업을 시작 하기 전 드로잉을 많이 합니다. 평소 다양하고 많은 것들에 주의를 기울이고 혹은 미술관에 가거나 소설과 영화를 보며 제가 생각하는 소재들을 다른 사람들이 어떻게 구현하는기 관찰하기도 하죠. 그것들을 응축시켜 스튜디오에서 이것저것 그려보고 재미있을 것 같으면 여러 번 드로잉 작업을 한 후 페인팅을 시작합니다. 드로잉 작업 중에 흥미를 잃은 것들은 서랍에 넣어두고 몇 년 뒤 꺼내 재미있는 구상이 떠오르면 다시 시작하기도 해요. 새우 정물 같은 경우에는 지난 여름, 유럽에서 레지던시와 휴가를 보내던 중 새우 칵테일이 항상 눈에 띄었고, ‘여름이면 참 많은 새우들이 우리에게 먹히는구나.’라고 생각하다 어린 시절 새우에 대한 좋지 않은 기억들이 떠올랐어요. 그와 동시에 바다의 수평선과 새우의 모양이 정물로서 흥미로운 선과 색을 가질 것 같아 작업을 시작했습니다.
나의 시선이 닿는 곳
Courtesy of the artist and Perrotin
Q3. 일상에서 ‘영감의 순간’을 마주칠 때는 주로 언제인가요? 그런 순간들을 기록해 두시는지요.
기록해두는 편은 아니지만 어렸을 때부터 우리가 살아가는 공간과 다른 존재들에 대해 관심이 많았던 것 같아요. 어렸을 때는 이런 적도 있었어요. 학원 버스를 기다리던 곳에 유독 개미가 많이 사는 나무가 있었는데, 그 나무를 보려고 일부러 한 시간 일찍 집을 나왔어요. 지금은 재건축으로 사라져버려 요즘 더 생각나곤 합니다.
미국에서 처음 정착할 때에는 영어로 말하는 것에 서툴렀고 인종차별도 많이 당했어요. 제가 마치 이빨 없는 짐승이나 물건같다는 생각을 했죠. 제 안에 생긴 감정들을 많이 관찰했고 당시에 제가 보던 세상이 집 없는 짐승의 시선이 아니었을까 생각하곤 했어요.
Q4. 초기 작품과 현재를 비교했을 때, ‘몸’을 대하는 작가님의 시선이 변화했다는 인터뷰를 읽었어요. 20대를 시작으로 지금에 이르기까지 작품에는 어떤 변화가 있었을까요?
필라델피아에서 대학교에 다닐 때 단순화와 추상화에 빠져있었지만 제가 표현하고 싶은 것들은 더 구상적인 것들이란 것을 알게 되었어요. 그래서 자연스럽게 인물이 들어간 그림들을 그렸습니다. 한국에서 경험한 성차별과 미국에서 받은 인종차별에 화가 많이 나 있었고 작품 역시 그런 제 감정이 반영되었죠. 그렇게 좀 더 직접적이고 공격적이었지만 저라는 사람 자체는 공격적이지 않아서 그런 감정들을 좀더 정화시켜 사용하려고 노력하며 작업을 해나가고 있어요.
제가 추구하는 예술의 방식이 무엇인지 천천히 알아가고 있습니다. 또한 하나의 이미지로부터많은 생각들이 열리기를 기대해요.
Q5. 현재는 캐나다에서 살고 계신 것으로 알고 있어요. 도시를 떠나 새로운 터전에 살고 있는 지금, 작가님의 작업에 영향을 주는 요소들도 변화했나요?
2020년에 뉴욕 페로탱에서 개인전을 했고 바로 몬트리올로 이사를 갔어요. 당시에 뉴욕에서 살던 친구들도 다들 뉴욕 근교인 코네티컷이나 버몬트쪽으로 이사를 가려고 했고 저는 남편이 캐나다인이어서 몬트리올로 이사를 가기로 했습니다. 뉴욕의 치솟는 스튜디오 렌트비와 거리를 걷는것의 두려움이 가장 큰 이유였던 것 같아요. 이전에도 인종차별은 있었지만 팬데믹 이후 더 심해졌죠. 제가 아는 한 한국 여성분이 저 역시 자주 가던 곳에서 구타를 당하기도 했고, 그 전날에는 제가 서있기도 했던 열차 플랫폼에서 한 아시아인이 습격당했다는 소식을 들었어요. 그 피해자가 제가 될 수도 있었다는 생각에 떠나고자 하는 마음을 더 굳혔습니다. 지금 사는 몬트리올은 뉴욕보다 훨씬 조용하고 불안을 촉발하는 요소들이 많이 없어 오로지 작업에만 집중하고 있어요.
Q6. 아시안이자 여성 작가라는 정체성은 작가로서 살아가는데 영향을 미칠수 밖에 없다는 생각도 듭니다.
대학원을 졸업할 때까지 미국도 유명한 작가들 대부분이 백인 남성들이었습니다. 아시아 여성이 작가로서 뉴욕에서 크게 성공한 사례를 많이 볼 수는 없었죠. 때문에 그 때는 작가가 된 제 모습을 상상조차 할 수 없었어요. 다행히 제가 다닌 학교들에서 여자 교수님들이 페미니즘 강의도 많이 해주셨고 여학생들이 작가가 될 수있도록 많은 도움을 주셨습니다. 제가 졸업할 때 즈음에는 뉴욕의 모든 갤러리에서 더 다양한 배경을 가진 작가들을 찾고 있었어요. 저보다 선배 여성 작가들과 교수님들이 갤러리들이 저와 접촉할 수 있도록 도와주었습니다. 최근에는 미국의 여러 갤러리들과 미술관이 아시아 여성의 시각을 다루는 전시를 열었고 저 역시 여러 곳에 참여했습니다.
지금까지, 그리고 앞으로
Courtesy of the artist and Perrotin
Q7. 한 가지 일을 오래 하다는 것은 수행과도 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예술가로서 살아간다는 것이 외롭게 느껴질 때도 있을 것 같아요. 때론 가라앉는 기분이 들기도 하고요.
혼자 있는 것을 매우 좋아해서 외롭다고 느끼지는 않습니다. 수행한다는 말에 매우 동의합니다. 작업할 때면 한 동작으로 8시간 넘게 앉아 있어야 해요. 그래서 이 동작을 유지하기 위해 일을 하지 않는 시간에는 운동과 스트레칭을 규칙적으로 해야 합니다. 일이 끝나면 머리를 비우고자 해요.
음식 만드는 것을 좋아해서 아침 운동을 한 후 스튜디오에 가져갈 저녁 도시락을 만들어요. 그러면서 가라앉은 시간을 이겨내는 것 같아요.
Q8. 올해를 개인전으로 시작했습니다. 아직 많은 날들이 남은 올 한 해 어떤 활동을 계획하고 계신지요?
페로탱 도쿄 개인전에 이어서 2023년에는 프랑스 디종에 있는 Le Consortium 미술관에서 개인전이 있고 캐나다 몬트리올의 Arsenal Contemporary, 중국 상하이 Pond Society, 미국의 Milwaukee 미술관에서 단체전이 계획되어 있습니다. 아트바젤 홍콩과 바젤에도 참여할 계획입니다.
2024년 초에는 뉴욕 페로탱 갤러리에서 뉴욕에서 하는 세번째 개인전을 열 예정입니다.
⚫ 장소 : 페로탱 갤러리 도쿄 ⚫ 주소 : 1F, 6-6-9 ROPPONGI, MINATO-KU, TOKYO 106-0032 ⚫ 관람료 : 무료 ⚫ 관람시간 : 오후 12시~ 오후 6시(일, 월 휴관) ⚫ 기간 : ~ 2023년 2월 25일 ⚪ 문의 : +81 3 6721 0687 / @galerieperroti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