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월의 라켓 레터는 가을을 주제로 한 만큼 가을의 시간을 충분히 눈과 마음에 담고자 했어요. 많고 좋은 전시 중에서 작지만 한 템포 속도를 늦추고 한참을 가만히 바라보며 잠시라도 비워내는 시간이 될 수 있는 전시를 찾아갔습니다. 10월의 마지막 ‘다녀온 전시’는 안젤름 키퍼의 개인전 ‘지금 집이 없는 사람’이예요.
안젤름 키퍼의 개인전은 작품 수가 많지는 않지만 가을을 담은 커다란 그림이 마치 가을의 숲길 한가운데 서있는 기분이 들게 했어요. 그리고 그림의 질감이 굉장히 독특해서 가까이에서 들여다 보면 색의 표현이 신기했어요. 언젠가 미술관에 갔을 때 함께 동행한 사람이 미술관에서 그림을 보는 즐거움 중 하나는 실물의 그림을 가까이에서 들여다 보면 그 질감이 주는 느낌 때문이라고 한 적 있는데, 안젠름 키퍼의 그림이 딱 그랬죠. 아쉽게도 10월 22일에 전시가 끝났지만, 라켓레터가 대신 가까이에서 그림을 들여다 본 느낌을 전해드릴게요.
편집/이미지 '마니' , 디자인 '임그노드' , 디렉팅 '해리'
사과 드립니다. 지난 26호에서 일부 인터뷰 내용의 중복 표기가 있었습니다. 이 부분을 수정한 버전은 아래 링크를 통해서 확인 할 수 있습니다.
영화 <사마에게>를 본 적 있으신가요? <사마에게>는 전쟁의 한복판에서 ‘사마’라는 이름의 갓난아기를 안고 5년간 시라아 내전을 카메라에 담은 와드-알 카팁 감독의 다큐멘터리 영화예요. 영화의 모든 장면은 와드가 직접 보고 경험한 일들이죠. 포격 피해로 피로 얼룩져 응급실을 찾은 임산부나 동생을 잃은 아이, 어느새 익숙해져 버린 포탄 소리에 놀라지도 않는 아이들의 모습 모두요. 와드 감독이 수없이 마주하는 위협의 순간에도 카메라를 든 건 비극의 시간을 살고 있는 아이들에게 조금이라도 나은 미래를 주고 싶었기 때문이었죠. 지금도 우리는 평온한 가을의 일상을 보내고 있지만 세상은 지금 어느 때 보다 안녕하지 못한 시간을 보내고 있어요.
우크라이나와 러시아의 전쟁은 끝을 모르고 있고, 전쟁으로 인한 비극과 두려움은 계속되고 있죠. ‘지금 집이 없는 사람’ 전시에는 진흙 벽돌로 된 설치작품이 있어요. 반쯤은 무너져 있는데 이는 턱없이 부족한 쉼터를 의미하죠. 1945년 독일에서 태어난 안젤름 키퍼는 폐허가 된 주택가에서 자랐어요. 그런 유년 시절의 영향으로 벽돌은 그의 작품에 반복적으로 등장해요. 하지만 이는 ‘무너져 버린 채 끝난 벽돌’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인류의 역사는 파괴되고 다시 재건되며 재탄생할 수 있는 가능성을 지녔다는 것을 의미하죠. 그리고 2차세계대전이 끝난 후 지금까지도 인류는 그 역사를 반복하고 있어요.
지금 집이 없는 사람은 이제 집을 짓지 않습니다.
<LARKET 촬영>
“릴케의 시는 60여년 간 내 기억 속에 존재해왔다. 나는 그의 많은 시를 암송할 정도로 알고 있고, 그들은 내 안에 존재하며, 이따금씩 수면 위로 올라온다.”
키퍼는 릴케의 시 ‘가을날’의 마지막 연 첫 번째 행의 구절 ‘지금 집이 없는 사람은 이제 집을 짓지 않습니다.’라는 문장을 작품에 직접 써넣었어요. 릴케를 향한 경의를 이렇게 표현한 셈이죠. 릴케가 시에 변화와 덧없음, 인간사의 부패와 쇠퇴를 담았다면 키퍼는 가을의 그림에 무엇을 담았을까요? 어스름한 나무의 윤곽과 초록의 기운이 사라지고 갈색이 된 나뭇잎, 살짝 내린 눈으로 덮인 회색의 나무는 그 나무의 생명이 끝났다는 것을 말하는 것 같지 않습니다. 나뭇잎은 채도를 잃었지만 충분히 반짝이고 아름다워요. 그렇게 나무는 그저 한 계절이 지나가고 있을 뿐이고 추운 겨울을 지나 다시 초록의 생명이 찾아오리라는 것을 상상하게 하죠. 하이드 파크에서 어느 햇빛 좋은 날, 아름답게 빛나는 낙엽을 보고 수없이 많은 사진으로 기록한 키퍼가 찾은 건 끝없이 이어지는 시작과 끝의 아름다움이었을까요?
납과 금으로 그리는 그림
<LARKET 촬영>
키퍼의 나무 그림이 유독 생동감이 느껴진 건 질감의 영향도 있었어요. 이 독특한 질감은 그가 짚과 재, 납과 금박을 사용해 그림을 그렸기 때문이예요. 그 중에서도 납은 키퍼가 꾸준히 작품에 사용하는 재료인데요, 그 이유에 대해 ‘인류 역사의 무게를 지탱할 수 있는 유일한 재료’라고 말한 바있죠. 또 하나 재미있는 건, 납과 금은 연금술의 시작과 끝이라는 점이예요. 폐허와 새로운 탄생이 이어져 있는 것처럼 키퍼가 사용하는 재료 역시 끝과 시작이 이어진 셈이죠. 그리고 키퍼의 작품들은 그림을 비바람에 그대로 노출시키는 방법으로 세월의 흔적을 표현하기도 해요.
⚫ 전시명 : 안젤름 키퍼 개인전 ⚫ 장소 : 타데우스로팍 ⚫ 주소 : 서울시 용산구 독서당로 122-1 ⚫ 기간 : 아쉽지만, 종료 되었어요 🙏 ⚫ 관람료 : 무료 ⚪ 문의 : 02-6949-1760 / @ThaddaeusRopac
☕ 전시 보고 뭐하지? 🍰
타데우스 로팍에서 전시를 본 후 독서당로를 내려오는 길에는 프린트 베이커리 한남점이 있어요. 프린트 베이커리 한남점 2층은 전시 공간인데요, 작은 규모지만 볼 만한 전시가 계속 이어져요. 키퍼의 전시를 본 날에는 릴리 작가의 전시가 진행 중이었어요. 유칼립투스가 가득 채운 벨기에 브뤼셀 풍경, 유칼리잎과 꽃으로 멸종위기의 코알라를 위로하는 그림이 너무 사랑스러웠어요. 전시 소식은 프린트 베이커리 웹사이트 www.printbakery.com에서 확인할 수 있어요.
늦은 점심은 한남 오거리 근처에 있는 ‘보울 박스(Bowl Box)’에서 가볍게 버섯 샐러드를 먹었어요. 네 명 정도가 앉을 수 있는 기다란 테이블 하나가 있는 작은 곳인데 귀여운 핑크 강아지 그림이 들어간 여러 굿즈도 파는 아기자기한 즐거움이 있는 곳이예요.
LARKET 촬영 - 프린트 베이커리
⚫ 장소 : 프린트 베이커리 한남점 ⚫ 주소 : 서울시 용산구 독서당로 87 ⚫ 운영시간 : 오전 10시~ 오후 7시 ⚪ 문의 : 02-795-5888
LARKET 촬영 - 보울 박스
⚫ 장소 : 보울박스 ⚫ 주소 : 서울시 용산구 독서당로 67 ⚫ 운영시간 : 오전 9시~ 오후 8시 ⚪ 문의 : 02-749-2927